[리스본=IT동아 강일용 기자] 남유럽의 일원인 포르투갈은 최근 경제 상황에 부침이 많았다. 유럽 재정 위기의 시발점인 피그스(PIIGS,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2011~2014년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로부터 많은 재정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2016년 이후 포르투갈은 IMF를 극복하고 반등에 성공했다. 비결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전통적으로 포르투갈의 주력 사업이었던 관광산업 강화다. 유럽, 브라질 등에서 많은 관광객을 유치해 재정적자를 개선했다. GDP(국내총생산) 대비 11.2%에 달했던 재정적자를 2%대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두 번째는 해외 투자 유치다. 50만 유로 이상의 부동산이나 100만 유로 이상의 포르투갈 주식을 구매하거나 10명 이상의 현지인 직원을 고용할 경우 '골든 비자'를 발급해 외국인이 포르투갈과 EU에서 사업을 진행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있다.
이제 포르투갈은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세 번째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바로 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다. 대학을 다니고 있거나 졸업한 청년들이 취업 대신 창업을 하도록 유도해 전 세계적으로 경쟁력있는 스타트업을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포르투갈에선 어떤 혁신적인 스타트업이 자라나고 있을까? 포르투갈의 주요 도시인 리스본과 포르토 근교에 위치한 스타트업들을 살펴봤다.
<포르투갈의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베타아이의 사무실 전경>
인공지능이 대세.. 저렴한 인건비로 포르투갈에서 창업 나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사업이 바로 인공지능이다. 포르투갈에서도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 가장 유망하다. 정글(Jungle.AI)은 인공지능을 활용한 중공업 혁신과 스마트 팩토리 솔루션을 개발 중인 스타트업이다. 전력 분배, 풍력 발전 최적화 등 기존에는 사람이 하던 작업을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있도록 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과거에는 특정 기계가 고장나면 전체 생산 라인이 멈추는 일이 잦았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정글은 생산 공정을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현재 생산 라인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특정 기계가 언제 문제를 일으킬지 사전에 예측하는 솔루션을 만들고 있다.
정글은 포르투갈 리스본에 본사를 두고, 네덜란드 델프트와 싱가포르에 지사를 두고 있다. 포르투갈인 1명과 네덜란드인 2명이 의기투합해 회사를 창업했다. 전체 직원 15명 가운데 90%는 포르투갈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
<안드레 실바 정글 데이터사이언티스트>
정글은 왜 이런 특이한 인력 구성을 갖추고 있는 것일까. 포르투갈의 저렴한 인건비 때문이다. 안드레 실바(Andre Silva) 정글 데이터사이언티스트는 "네덜란드와 달리 포르투갈은 인건비가 저렴하다. 그렇다고 교육열이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프로그래머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같이 능력을 갖춘 인력을 더 저렴하게 고용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창업자들은 네덜란드 출신임에도 포르투갈에서 창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리스본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EU 소속 국가 사이에는 인력 이동이나 기업 진출이 자유롭기 때문에 포르투갈에 본부를 두더라도 유럽 전체에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현재 한국에서 가장 유망한 분야로 각광받고 있는 블록체인의 열풍은 아직 포르투갈에 도달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의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베타아이(Beta-i)의 페드로 로차 비에이라(Pedro Rocha Vieira) 최고경영자는 "현재 포르투갈에서는 인공지능과 생활밀착형(O2O) 스타트업이 각광받고 있다. 블록체인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관련 스타트업이 활성화된 상태는 아니다"고 말했다.
의학, 축산업 같은 기존 산업 혁신에도 관심
의학, 축산업 같은 기존 산업을 혁신하려는 스타트업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뉴라이즈(Nu-Rise)는 의료기기를 개발하려는 스타트업이다. 포르투갈의 명문 대학인 아베이로 대학에서 석박사를 받은 연구 인력 4명이 뭉쳐서 창업했다. 기존 방사선 치료기기는 암 세포만 죽일 수 있는 최적의 조사(照射)량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뉴라이즈는 이러한 방사선 치료에서 암 세포만을 죽일 수 있는 최적의 조사량을 찾아주는 기기를 만들고 있다. 현재는 유방암을 대상으로한 임상실험을 진행 중이다.
<루이스 모딩요 뉴라이즈 대표(가운데)와 직원들>
루이스 모딩요(Luis Moutinho) 뉴라이즈 대표는 "미국의 경우 항암 치료에 따른 부작용 때문에 매년 90억 달러의 비용이 낭비되고 있다. 최적의 조사량을 찾으면 항암치료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며, "현재 관련 특허를 받은 후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암 전문 병원과 협업해 임상 실험을 진행 중이다. 내년 정식으로 제품을 출시해 유럽, 미국 시장을 공략한 후 아시아에도 진출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애피스(APiS)는 조금 독특한 스타트업이다. 양봉업자가 효율적으로 꿀을 채취할 수 있는 기기와 앱을 만들고 있다. 미겔 벤토(Miguel Bento) 애피스 대표는 양봉업자들이 여기저기 뿌려둔 벌통의 상황을 제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관련 서비스에 개발에 나섰다. 벌집 안과 밖에 다양한 센서를 부착해 여왕벌의 건강, 꿀벌의 생존률, 꿀 채취율 등 벌통 내부의 상황을 모니터링한 후 이를 양봉업자에게 바로 알려주고 있다. 궁극적으로 기계를 활용해 벌통 관리를 자동화해서 관리 인력을 줄이고 벌통의 이동성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표다. (많은 양봉업자들이 꽃이 피는 시기에 맞춰 벌통을 옮기고 있다)
<애피스가 개발 중인 벌통 관리 센서. 곰이나 말벌의 습격같은 비상사태에도 대처할 수 있다>
벤토 대표는 "벌통에 애피스의 기기와 센서를 설치하면 양봉업자들은 현재 벌통과 꿀벌들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곰이나 말벌의 습격 같은 위급 상황에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고 서비스 개발 의의를 설명했다.
골든 비자보다 더 받기 쉬운 스타트업 비자로 유망 스타트업 모신다
현재 포르투갈은 골든 비자보다 한층 받기 쉬운 '스타트업 비자' 제도를 만들어 해외 유망 스타트업을 자국으로 유치하고 있다. 해외 스타트업이 포르투갈에 지사를 내면 최대 4명까지 2년 동안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비자를 받을 수 있다. 법인을 설립할 경우 투자 비용의 절반을 정부에서 돌려준다. 또한 EU 소속 스타트업처럼 EU펀딩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로드리고 웻치 베타아이 매니저. 브라질 출신으로, 현재 포르투갈 스타트업 생태계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다>
실제로 유럽 시장에 진출하길 원하는 해외의 유망 스타트업과 인력이 포르투갈로 모여들고 있다. 가장 교류가 활발한 국가는 브라질이다. 한때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같은 포르투갈어를 쓰는 만큼 의사 소통이 편하기 때문이다. 로드리고 웻치(Rodrigo Zwetsch) 베타아이 커뮤니티 매니저는 "브라질의 인구나 경제 규모가 포르투갈보다 크다보니 스타트업도 더 많고 서비스도 더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이 유럽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웻치 매니저도 브라질 출신이다.
이와 함께 글로벌 스타트업 유치를 위해 영어로도 충분히 소통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웻치 매니저는 "포르투갈, 브라질 두 국가의 우수 인력들은 영어를 기본적으로 잘 한다. 국가 차원에서 영어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에 진출한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현지인들과 영어로 소통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투자를 적극 유치하려는 포르투갈 정부의 정책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50만 유로 이상의 부동산을 구매하거나 100만 유로 이상의 주식을 구매하면 사업 비자를 내준다는 정책을 이용해 포르투갈의 부동산과 기업을 사들이고 있다. 리스본의 고층 건물 가운데 상당수가 중국 자본으로 넘어간 상태다. 베타아이가 입주해있던 20층 내외의 건물도 중국 사업가가 사들였다. 중국 기업들은 포르투갈의 금융, 전력 등 사회 인프라 관련 기업의 지분에도 투자를 단행 중이다. 포르투갈 최대의 보험 사업자인 피델리다데(Fidelidade)의 전체 지분 가운데 50%를 중국 자본이 인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의 스타트업과 인력도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포르투갈을 활용하고 있다. 리스본과 포르토 시내 어디서나 화웨이와 DJI 매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16세기 포르투갈과 유럽 열강은 마카오를 앞세워 중국 대륙에 발을 디뎠다. 이제 반대가 되었다. 중국 자본이 포르투갈과 리스본을 중심으로 유럽 대륙에 발을 디디고 있다.
비에이라 베타아이 최고경영자는 "한국이 IT나 스타트업 창업 열풍 면에서 포르투갈보다 앞서나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포르투갈이 한국의 기업과 스타트업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며, "스타트업이 유럽 시장에 정착할 수 있도록 포르투갈 정부와 민간 기관이 많은 도움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