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애틀 출장이요?"
갑작스럽지만 미국 시애틀 출장이 결정됐다. 이유는 마이크로소프트(MS)이매진컵 2014. 전세계 유명 도시를 돌면서 개최되는 세계 최대의 학생 SW 경진대회다. 특히 이번 이매진컵 2014는 MS의 본사가 있는 시애틀(사실 시애틀 옆에 있는 소도시 레드몬드에 있지만, 다들 시애틀에 있다고 알고 있으니 넘어가자)에서 개최되는 만큼 MS MVP뿐만 아니라 MS 본사 직원들도 멘토로 참여한다고 한다. 평소 스타트업 육성과 학생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이번 대회은 꼭 한번 경험해보고 싶었다. 때문에 주저 없이 자원했다.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3일 동안 열리는 본선 일정에 앞서 7월 21일 한국 대표인 보몬 팀을 만날 수 있었다. 보몬 팀은 6~9세 여아도 손쉽게 적응할 수 있는 캐주얼 플랫폼 게임 '언더 베드(Under bed)'를 개발한 학생 개발자 팀이다. 육현수(25세. 한양대학교 영상디자인 담당), 정서진(25세. 숭실대학교 멘토 담당), 김보영(24세. 동국대학교 프로그래밍 담당), 김수민(23세. 한양대학교 영상디자인 담당), 정은솔(21세. 선문대학교 프로그래밍 담당)총 5명의 학생으로 구성됐다.
이매진컵은 국제 대회인 만큼 모든 발표, 의견 제시, Q&A 등을 영어로 진행해야 한다. 당연히 심사위원과 멘토들도 영어로 질문을 던지고, 조언을 들려준다. 통역같은 것은 제공하지 않는다. 영어를 못하면 말짱 꽝이다. 때문에 그들은 처음 만나는 날 한국MS 직원을 대상으로 영어로 하는 프레젠테이션을 연습하고 있었다. 세계 진출에 제아무리 영어가 필수라지만,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 오는 팀은 앱이나 게임의 품질을 다듬는 것만 힘쓰면 되지만, 보몬 팀은 한국대표라는 그 죄(?)하나 만으로 따로 영문 프레젠테이션 연습까지 해야 했다. 세계 진출을 노리는 우리나라 개발자들의 노력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은 아직 미완성이었다. 발표는 마치 대본을 읽는 것 같았고, 앞에 선 학생들의 얼굴에는 긴장감만 가득했다. 한국MS 직원들은 이렇게 경직된 프레젠테이션 태도를 고치기 위해 아낌없이 조언을 해줬다. 천만다행으로, 그들의 작품인 언더 베드는 기대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줬다. 미려한 그래픽과 수많은 스테이지, 학생들이 대회 입상을 목표로 만든 게임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기자뿐만 아니라 한국MS 김영욱 에반젤리스트도 "영어라는 관문만 넘어서면 충분히 상위권 입상을 노릴만한 작품"이라며, "다만 어떻게 수익을 낼 것인지 좀 더 고민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시애틀로 떠나는 비행기 속에서 내심 '그 친구들이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꼭 상을 타길 기원했다. 그래야 편집장한테 "기사 자리 여유있게 준비해 줘요"라고 큰소리치며 떠난 보람이 있을 것 아닌가. 응원의 이유가 너무 속물적이다. 나도 참 주책이야.
대회 첫째 날
대회 첫째 날, 보몬팀은 시애틀 워싱턴 대학교 케인(Cain)홀에서 자신의 작품을 MS MVP들에게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보몬 팀은 잠옷을 입고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한다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게임의 콘셉트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발표자의 패션도 프레젠테이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요소임을 잊지 않은 듯해서 기대됐다.
MVP는 MS가 학생들의 작품을 평가하고, 조언을 들려주기 위해 외부에서 초빙한 전문가들이다. 흥미롭게도 아는 얼굴이 제법 섞여 있었다. 알렉세이 파지노프(alexei pajitnov), 테트리스의 제작자로 유명한 러시아 출신 개발자다. 아담 시슬러(Adam Sessler), 미국의 유명 게임 기자이자 비평가다. 두 명의 MVP는 보몬 팀에게 게임의 목적, 타깃층, 그래픽 개선 방안, 상용화 방법 등에 대한 조언을 해줬다.
보몬 팀은 겉으로 담대한 척 했어도 속으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파지노프가 딱딱한 러시아 억향으로 그림자 그래픽이 추가되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충고하자,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태도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MVP의 조언을 하나라도 놓칠새라 5명이 귀를 쫑긋하고 집중했다. 귀여운 복장과 모습, 반면 진지한 태도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MVP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특히 시슬러는 언더 베드의 콘셉트와 완성도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보몬이 출전한 게임뿐만 아니라 월드시티즌십, 이노베이션 등 다른 경쟁 부문을 살펴보면서 느낀 점인데, MS는 개발자들의 평가 못지 않게 다른 업계 전문가들의 평가도 중요시 여기는 듯 했다. 시슬러뿐만 아니라 지디넷 메리 조 폴리 수석 기자 등 유명 기자를 각 부문에 MVP로 한 명씩 배치한 것이 그 증거다. 기술뿐만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개발 방향, 상용화 방법 등을 보다 다양한 시각에서 조언해주기 위해서 아닐까. 국내 SW 경진대회도 이 점은 본받을 필요가 있다.
대회 둘째 날
둘째 날은 레드몬드 MS 본사에서 MS 직원들을 대상으로한 공개시연회가 진행됐다. 이날 보몬 팀의 경쟁자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러시아 'Rainy Studio 팀'과 프랑스 'Anar 팀'이 눈에 띄었다. 러시아 팀이 선보인 모바일 액션 퍼즐 게임은 그 완성도가 결코 언더 베드보다 떨어지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듯 많은 관람객이 러시아 부스에 몰려 있었다. 프랑스 팀이 선보인 3D 액션 게임은 어지간한 상용화 게임 못지 않은 3D 그래픽을 자랑했다. 관람객들의 시선을 독차지했다.
불안할 법도 하건만 보몬 팀은 최선을 다했다. 다른 팀처럼 단순히 게임을 소개하고 플레이하는 것을 돕는 데 그치지 않고, 게임을 제대로 즐기고 높은 성적을 거두면 환호하는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부스에선 시종일관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MS 본사에서 근무하는 한국 개발자들도 여럿 방문해 보몬 팀에게 조언을 해주고, 응원을 해줬다.
공개시연회가 끝나고 마침내 MVP가 진행하는 최종 평가의 시간이 왔다. 공정한 평가를 위해 기자들마저 밖으로 내쫓겼다. 밖에는 정서진 학생이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정서진 학생은 게임을 직접 개발한 당사자가 아니라 팀의 일정을 관리하고, 개발자들이 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멘토의 역할로 팀에 참가했다. 게임 개발에 직접 참여한 입장이 아니다 보니 최종심사 자리에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도 게임 개발을 함께한 팀원인데..." 맞는 말이다. 게임이 어디 개발자와 디자이너만 있다고 뚝딱 튀어 나오는가. 그들이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인원도 게임 회사에는 많다. 그 누구도 그들의 공이 적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서진 학생의 얼굴은 평소처럼 밝아졌다. "친구들이 잘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아무렴, 나도 믿는다.
대회 마지막 날
운명의 날이 밝았다. 오전 8시 시애틀 워싱턴 스테이트 컨벤션 센터에 2,000명이 넘는 관객이 몰려 들었다. 이매진컵 참가자와 취재진뿐만 아니라 전세계 MS 개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MS 소속 개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MS 신기술에 대한 교육을 받는 테크레디(Tech Ready)컨퍼런스가 함께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석은 금새 꽉찼고, 워싱턴 대학교 합주부가 등장해 공연을 진행하자 분위기는 달아 올랐다.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와 함께 세 명의 최종 심사위원. MS의 최고경영자 사티아 나델라, 코드닷오알지(Code.org)의 공동 설립자 하디 파토비, 소셜 뉴스 공유 사이트 레딧(Reddit)의 총괄 책임자 에릭 마틴이 자리에 앉았다. 이제 각 부문별로 최종 입상자 3 팀을 발표할 차례다. 게임 부문 발표가 다자오자 보몬 팀은 눈에 띄게 긴장했다. 그 동안의 노력을 상금이라는 형태로 보답받을 것인가, 아니면 이매진컵 참여 그 자체에 의의를 둬야하는가.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3위는 윈도폰용 모바일 게임을 선보인 이집트 팀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보몬 팀과 기자의 얼굴엔 오히려 안도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내 생각에, 그리고 보몬 팀의 생각에 이집트 팀의 작품은 결코 언더 베드보다 뛰어나지 않다. 이집트 팀이 3위라면 우리는 더 높은 성적을 받았을 것이다.
예감은 적중했다. "2위 보몬" 발표를 맡은 파지노프가 그리 말하는 순간 보몬 팀은 얼싸 안고 무대로 뛰어나갔다. 비록 1위를 하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전세계 34개국 34개 팀이 참여한 대회에서 거둔 쾌거였다. 보몬 팀과 일정을 함께 한 한국MS 송은비 대리도 "역대 최고의 성적이네요"라며 웃는 기색이었다. 입상이 확정되고 기념 촬영의 시간, 시슬러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서툰 한국어로 "축하해요"라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축하해요, 보몬 팀.'
이후 이야기는 "꿈 이루려면 나보다 우리가 중요해요" 2014 이매진컵 은메달 보몬팀 인터뷰 기사에서 확인해보세요.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